기술 발전에 힘입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술적 유토피아 속에서 풍요를 즐기기를 바란다. 또, 디지털 디스토피아로서,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이 있다. 1995년,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을 펴내며, 기술적 유토피아에 대한 우려를 더했다. 그는 노동의 ‘해방’에 반대하며 노동의 종말을 경계했다. 그것은 자유롭게 여가를 즐기는 한량보다는 실업과 임금 삭감을 걱정하는 노동자들의 혼란으로서 대표되는 것이다.
노동은 서서히, 그러나 비극적으로 종말한다. 산업 구조가 개편되면서 고임금 일자리는 사라지고, 저임금 일자리가 적게나마 그 자리를 채워간다. 계속되는 일자리의 소멸은 끝내 완전한 노동의 종말을 이끈다. 이어지는 결과들은 다음 세 가지의 소제목으로 요악된다. “소프트웨어에 의한 노동자의 대체”, “리엔지니어링”, “노동자 없는 세계”가 그것이다. 노동을 위협하는 것은 첫째로 “소프트웨어”, 즉 컴퓨터이다. 컴퓨터는 인건비 감축을 원하는 기업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효율적으로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한다. 다음으로는 “리엔지니어링”, 앞선 컴퓨터의 효율성에 부응하고자 하는 기업들이 만들어낸 노력의 산물이다. 기업 구조는 간소화되고, 불필요한 인력은 제거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노동의 종말과 함께 도래할 미래를 그려본다. 그의 시선에서, 그 미래는 치솟은 실업률과 노동자들의 공포로 점칠된 세계다.
노동은 종말했나?
물론, 그의 예견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는 제조·사무업 부문에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으며 앞으로 이 추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향후 10년 이내에 제조 부문의 고용은 12퍼센트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든가 “향후 30년 이내에 세계 전체 수요에 필요한 모든 재화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현 세계 노동력의 단지 2퍼센트만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제조업 고용률은 최저 19%이고, 노동 가능 인구의 2%만이 노동에 종사하거나 잉여 생산물이 나머지 98%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은 실현되지 않았다(World Bank, 2023). 게다가 미국의 최근 실업률은 3~4%대로 완전한 자연 실업률이라고 말하기에 손색이 없다.
다행히, 저자의 주장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노동의 종말이 불러온 사회적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젊은 층은 반사회적 행위를 통해 분노를 드러내며, 노년층은 무력감을 느끼고, 노동자들은 포퓰리즘을 내세운 극우 정치인에게 표를 던진다고 말한다. 노동은 종말하지 않았지만, 그 결과만큼은 도래한 것일지도 모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백인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당선되었다. 포퓰리즘에 빠져든 미국 시민들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기까지 했다.
한국 사회는 또 어떠한가. 이른바 칼부림이라고 불리는 이상 동기 범죄들이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해,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사회의 대한 불만을 범행 동기로 꼽고는 한다. 이는 저자가 예측한 젊은 층의 반사회적 행위이자 분노의 표출이 아니겠는가. 이제 다음의 물음에 답할 차례이다. 젊은 층은 왜 분노하는가? 노동자들은 왜 포퓰리즘에 빠져드는가?
저자는 그 원인이 노동의 종말에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노동은 종말하지 않았다. 한편, 저자는 노년층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힘에 의해 사로잡혔다”는 무력감을 느낀다고 지적한다. 30년 전 노년층이 느꼈다는 그 무력감을 현재 젊은 층이 느끼고 있다면 어떠한가? 1995년의 사회에 비해 2023년의 사회는 더욱 빠르게 변해 간다. 더불어 그 사회의 구성원이 느낄 압도감과 무력감은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즉, 사회적 힘에 압도된 젊은 층은 사회적 기류에 부응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기하기를 거듭하며 탈진하거나, 이를 포기하고 분노를 표출시켜 반사회적 행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 층은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회에 흐름이 치여, 포퓰리즘에 안주한다는 것이다.
잠시 멈추어서
다시, 앞선 논의를 정리해 보자. 『노동의 종말』의 저자는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맥락에서 노동의 종말을 비판했다. 본고는 그 경제적 비판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사회적 비판을 수용했다. 다만, 그 원인은 노동의 소멸이라기보단 너무도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지친 사회 구성원의 무력감이자 이어진 분노라고 주장했다. 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금의 사회는 무한 경쟁이라는 수식어로 표현되고는 한다. 그 경쟁이 상호보완적인지, 아니면 단지 바닥치기 경쟁에 불과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늘 경쟁해야만 한다는 그 압박감이, 그 사회의 구성원을 압도하고 사회적 주체로서 그들의 지위를 박탈한다.
그 경쟁이 기술적 유토피아를 바라보는 것이든 디스토피아를 바라보는 것이든,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디스토피아를 바라본 저자의 예측은, 잠시 경쟁에서 벗어나 사회의 현주소를 점검할 기회를 주었다. 본고는 노동의 종말에 대한 저자의 시각에서 출발하여, 효율성과 생산성만을 바라보는 지금의 사회가 마치 종말적인 노동의 디스토피아와 다름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우리가 지금 과도기적 사회를 보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또 무엇인가 희망적인 성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단지 수단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미래를 바라보기 이전에, 현재 우리의 사회, 우리의 삶은 어떠한지 숙고해 보아야 한다. 반성하고 성찰하기를 멈춘다면 더 나은 미래를 그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2023년 11월 24일
© 이시후 (keepedia0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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