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스베이거스에서 사망한 권투 선수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김연수의 “달로 간 코미디언”이 시작된다. 배추머리 여자는 ‘나’에게 그 권투 선수의 “고통을 소설로” 쓸 것을 제안한다.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면”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말에 여자는 “고통이 뭔지 이해할 수 있”는지 묻는다. 고통을 이해한다는 건 무엇인가.
이어 작품의 배경은 ‘나’와 여자가 처음 만난 지 일년이 채 되지 않은 휴양지로 향한다. 방송국 PD로서 ‘우리 인생의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여자는 ‘나’에게 침묵의 가치를 말한다. “인생이란 ... 이야기 사이에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라며, 여자, 즉 안PD는 자신이 무수히 편집해 낸 침묵의 시간에 출연자가 차마 전하지 못한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고찰은 3년이 흐른 2004년, ‘나’와 안PD가 한 남자의 침묵을 이해하며 비로소 실현된다.
‘나’는 안PD를 찾아가 고통의 이야기를 전한다. ‘나’는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곧 고통이라며, “이해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 한가운데에 놓여 있”으면 “세상 모든 게 고통”이 된다고 말한다. 소통의 부재, 이것이 ‘나’가 이해한 고통이었고, 3년 전 안PD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되기도 한다. 또 ‘침묵’과 ‘암흑’의 세계에 빠져드는 ‘고통’은 곧 ‘나’와 안PD가 앞서 말한 ‘한 남자’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안PD의 기억 속에 ‘한 남자’는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부끄러운 아버지이자,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안PD는 2001년 9월 11일, “늘 함께 붙어 있”던 쌍둥이 빌딩이 서로 떨어질 때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시도했고, 3년 뒤 ‘나’가 그 단절이 소통할 수 없다는 고통이라고 말할 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안PD는 먼저 아버지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각적인 암흑 속에 있었다는 것을 처음 이해하게 되고, 곧 소통할 수 없는 고통스런 암흑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는 권투 선수와 함께 라스베이거스로 간 뒤 실종되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행적인 고속도로 옆 사막에 전복되어 있던 렌터카였다. 안PD는 아버지의 행적을 따라 고속도로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깊고 광활한 바다”를 본다. 안PD는 “침묵과 암흑”의 순간, “없어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사람의 “감정을 읽”는다고 했다.
넓게 펼쳐진 사막 앞에 놓인 만월 아래에서, 1982년의 아버지는 2004년의 안PD는 모두 침묵했다. 아버지의 침묵은 차마 전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담은 채, 결코 소통할 수 없어 고통스러울 뿐인 암흑 속의 침묵이었다면, 안PD의 침묵은 마침내 아버지의 그 침묵과 고통을 이해하게 된, 밝게 빛나는 만월 아래의 침묵이다. 그 침묵에서, 안PD는 아버지를 이해했고, 곧 고통을 이해했다.
또, ‘나’는 그 침묵에서 “사막에서 실종된 한 남자의 고독을, 그 남자를 이해하기 위해 사막을 향해 달려가는 한 여자의 욕망을, 그리고... 사막의 빛과 어둠, 열기와 서늘함, 고독과 슬픔”을 듣는다. 침묵에 대한 안PD의 첫 번째 고찰에서 시작된 고통에 대한 이해는, 곧 단절과 소통이 되지 않는 것에서 발견한 ‘나’의 두 번째 고찰로 이어지고, 마침내 아버지의 침묵에서 진정한 이해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실현된다.
‘나’와 안PD는 아버지가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였고, 그 만월 속에서 아버지를 이해했다. 밝은 만월 아래, 밝게 빛나는 깊고 광활한 바다에서, 결국,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의 마지막 구절처럼, “마침내 바다가 우리 위를 덮”친 것이었다. 곧 “달로 간 코미디언”은 고통과 암흑, 그리고 침묵과 어둠, 마침내 소통과 이해의 가치를 깊이 있게 고찰해낸 것이다.
2023년 6월 16일
© 이시후 (keepedia0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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