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오행으로 김광섭 읽기
음양오행 읽기
음양오행(陰陽五行)은 동양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기초적 틀로 자리하였다. 음(陰)과 양(陽)이라는 두 가지 극이 세계를 이루고, 그것으로부터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오행이 발하였다는 것은 오래간 동양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문화와 언어로 스며든 채 동양인의 정서에 잔재하는 것이다.
음양설은 본래 천문학과 깊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농경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 절기를 알기 위하여 하늘의 움직임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이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음양설로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별자리(二十八宿)를 중심으로 황도(黃道)와 백도(白道)를 그리고, 이로써 낮의 길이로 구분지은 사시(四時)—춘분(春分), 하지(夏至), 추분(秋分), 동지(冬至)—를 알 수 있게 되었다(전창선·어윤형, 2010).
이러한 구분은 천문에 대한 객관적인 기술 이상의 것으로 기능하였다. 하늘이 땅을 변화시킨다고 믿어졌고, 실제로 그러하였기에 이를 설명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철학이 가미된 것이다. 땅이 하늘의 기(氣)에 영향을 받을 때 이러한 기를 발산하는 것은 하늘의 별과 같고, 이중에서 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이 된다(같은 책).
해와 달, 목화토금수의 다섯 행성은, 고정된 채 좌선左旋하는 항성들과 달리 조금씩 우행(右行)하는, 움직이는 힘이었다. 이 일곱 개의 힘에서 음양오행이 출발한다. 해는 “빛을 통해 주야(晝夜)라는 양기(陽氣)의 변화를 주도하고, 달은 인력(引力)이라는 힘을 통해 음형(陰形)의 변화를 주도”한다(같은 책, 86쪽). 이렇게 해와 달이 음양을 일으킬 때, 오성은 해가 지나는 별무리(二十八宿)를 행(行)하며 오행을 일으킨다(같은 책).
하늘을 바라본 음양오행의 질서는 그대로 땅에 적용되었다. 하늘의 움직임이 지상에서 벌어질 일의 조짐이 된다고 보아 점괘가 발달하였고, 동양 의학은 인체를 하늘의 질서에 빗대어 설명하였다. 이처럼 만물의 근간이 된 음양오행은 “하늘이 땅을 변화시킨다.”라는 명제로서 인간사를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다(같은 책, 160쪽).
음양오행으로 김광섭 읽기
김광섭1904~1977은 「성북동 비둘기」를 대표작으로 하는 시인으로서, 시대적 모순과 산업사회의 폐해를 나타낸 시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시 또한 적지 않게 남겼는데, 특히 ‘별’에 대하여 노래한 시가 눈에 띈다.
「우주의 질서」 어둠이 온다 밝음에 앞서 어둠이 온다 별이 기다려 같이 온다 잠도 기다려 온다 새벽이 온다 밝음에 앞서 어둠이 간다 잠도 간다 |
이 시는 밤을 전후한 시간의 흐름을 요약적으로 그리고 있다. ‘어둠이 온다’는 것으로 보아 저녁이다. 다시 ‘밝음’이 올 아침이 되기 전에 먼저 ‘어둠’의 밤이 오는 것이다. 밤이 되니 ‘별’도 오고, 화자의 ‘잠’ 또한 밀려온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다시 아침이 오기 전 ‘새벽’이 오고, ‘어둠’은 떠나간다. 화자도 ‘잠’에서 깨어날 준비를 한다.
제목이 「우주의 질서」인 점에서, 세상의 이치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음양의 것으로 바라볼 때, ‘밝음’을 나타내는 태양은 양(陽)이고 ‘어둠’의 달은 음(陰)이다. 즉, ‘밝음’은 양(陽)의 시간이고, ‘어둠’은 음(陰)의 시간이다. 양(陽)과 음(陰)은 대조되어 갈등하면서도, 서로 조화된다. ‘밝음’과 ‘어둠’의 대비에서 음양의 조화가 느껴진다.
음(陰)이 있기에 양(陽)이 있고, 양(陽)이 있기에 음(陰)이 있다. 음(陰)과 양(陽)으로 나누어진 둘은 본래 하나이고, 다시 하나가 되려고 함과 동시에 축을 이루어 대칭된다. 그러므로 ‘밝음’의 양(陽)이 오기 전에 ‘어둠’의 음(陰)이 와야 하는 것이고, ‘어둠’이 왔기에 ‘새벽’의 ‘밝음’이 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둠’의 시간이 오더라도 ‘밝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밝은 ‘별’이 함께 왔기 때문이다. 음(陰)과 양(陽)은 조화되어 안정된다. 안정된 음양의 시간에서 화자는 ‘잠’이 온다. 하늘이 음양적(陰陽的) 균형을 이룰 때, 땅 위에 누운 화자의 몸도 균형을 찾아 비로소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잠’을 청할 수 있는 것이다.
균형에 앞서 ‘별’과 ‘잠’은 조바심 내지 않는다. ‘어둠’이 오기를 ‘기다려’ ‘별’이 오고, ‘잠’ 또한 ‘기다려’ 온다. 안달내지 않더라도 ‘밝음’과 ‘어둠’의 순환, 음양의 순행은 세상의 이치로서 ‘우주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늘의 질서는 곧 “하늘이 땅을 변화시킨다.”라는 명제를 따른다. 하늘이 질서로이 조화를 찾았기에 화자에게도 그 변화가 이르러 ‘잠’이 찾아올 수 있었고, ‘어둠’이 가고 ‘새벽’이 와 동적인 양(陽)의 기(氣)가 화자를 뒤흔들 때 ‘잠’은 떠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저녁에」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다시 만나랴 |
‘우주의 질서’를 음양적(陰陽的) 사고관으로 이해한 김광섭은 ‘나’를 더욱 표면에 드러내며 세상의 질서에 몸을 맡긴다. 또다시 저녁,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지상의 화자를 ‘내려다’보고, 땅 위에 선 ‘나’는 하늘의 ‘별’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양(陽)이고 땅은 음(陰)이다. 양기(陽氣)는 땅으로 내려오고, 음기(陰氣)는 하늘로 올라가 조화를 이룬다. 이로써 화자와 시적 대상의 상호 인식과 만남은 자연스러운 운명과 같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며 ‘별’과 ‘나’는 사라진다. 음陰의 배경 아래 어우러져야 할 ‘별’이 ‘밝음’에 휩싸이고, 화자는 ‘어둠’ 속에 빠져 들어가며 음양의 조화가 무너진다. 화자와 ‘별’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고 서로 간의 눈맞춤은 지속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밤이 깊어짐에 따르는가? ‘별’은 낮 동안 태양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으니 ‘밤’이 되어서야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밤이 깊어진다는 것은 곧 아침이 다가와 태양의 시간에 도달하기 때문일 것이다. 깊은 밤을 지나 새벽녘이 되자 태양의 ‘밝음 속에’ 별이 사라지고, 그림자의 ‘어둠 속에’ 화자가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밤’은 음양이 서로 투쟁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음양은 불완전한 일부가 아니다. 따라서 음陰의 본성을 가진 것은 양(陽)의 형(形)을 가지고, 양(陽)의 본성을 가진 것은 음(陰)의 형(形)을 가진다. 양(陽)의 ‘별’과 음(陰)의 화자가 1연을 지나 하나가 되자, 서로의 형(形)이 “순일”하지 못하는 모순—“음양의 본성은 서로 좋아함(好)이지만 음양의 현실은 서로 미워함(惡)”이다.—에서, 서로 분열하는 “투쟁”이 나타나는 것이다(전창선·어윤형, 2010, 228-9쪽).
그러나 화자는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앞서 「우주의 질서」에서 살펴보았듯이 낮과 밤, 음(陰)과 양(陽)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순환한다. 지금의 태양빛이 화자와 ‘별’ 사이의 단절을 초래하였지만 화자는 머지않아 다시 합일의 시간, 밤이 찾아올 것을 알고 있다. 이로써 화자는 ‘별’과의 재회를 약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3연에서는 ‘나’와 ‘별’이 ‘너 하나’, ‘나 하나’로 변주되어 표현된 것이 눈에 띈다. 음양의 대비가 두 개의 하나로 바뀌었다. 음양이 본래 하나인 것처럼 둘은 본래 하나였다. “한 개로 되어 있는 것은 둘로 분열하려 하기 때문에 움직이려(動)하고, 두 개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로 합치려 하기 때문에 고요하려고(靜)” 한다(같은 책, 193쪽). 하도(河圖)에서 “둘은 하나로 통합하려고” 하듯이, 두 개로 “추상”된 ‘너’와 ‘나’ 또한 하나가 될 것이다(같은 책, 196쪽).
참고문헌
김희정. (2004). 한의학에서 본 음양오행설. 도교문화연구, 21, 195-215.
전창선 & 어윤형. (2010). 음양오행으로 가는 길. 서울: 와이겔리.
2024년 8월 16일
© 이시후 (keepedia0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