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네시(수재나 클라크): ‘공간’과 ‘일지’
“내가 사는 ‘집’은 무수히 많은 방과 끝없는 복도가 이어지는 광활한 곳이다. 방의 벽에 는 수천 개의 각기 다른 동상들이 줄지어 있다. 집 안에는 바닷물이 흘러들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파도가 노래한다. 하늘에는 언제나 태양과 달과 별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아름다운 나의 ‘집’,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사람이자, 탐험가이자, 과학자이다. 나는 오늘도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여행하고 모험한다. 내 이름은 피라네시, 나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수재나 클라크. 『피라네시』. 김해온 역. 흐름출판. 2021.
즉, 피라네시는 현실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새로운 공간에 놓여 있다. 그는 그 미지의 공간을 ‘집’이라고 칭한다. 바닷물이 들이치는 때를 기록하며 정기적인 바닷물의 범람을 예측하고, 스스로 안치한 십여 구의 백골과 인사한다. 그곳에 살아있는 생물이라고는 그 자신과 바닷물과 함께 밀려오는 해조류, 그리고 바닷새들 뿐이다. 그는 주기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한 중년의 남성, 그가 이르기를 이른바 ‘친구’와 방마다 들어선 동상들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그는 끊없이 펼쳐진 방들을 탐험하며 경험한 모든 것을 일지에 정리한다.
그렇게 여러 방들을 오가는 중 그는 점점 수상한 특이점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갈기갈기 찢어진 채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 일지의 한 조각, 그와 친구를 제외한 사람들의 흔적, 누군가 지운 그의 일지 등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그에게 밀려오기 시작한다. 그때 그는 누군가가 그에게 남긴 메시지를 발견한다. 친구는 그가 위험하고 위협적인 인물이라며 그에게 경고하지만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그의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그러는 한편, 그는 그의 일지에게 뜻밖의 기록을 발견하는데 이는 그가 한 오컬트 신봉자를 추적하던 기자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일지가 친구의 위선과 모순을 고발하고 있는 가운데 그는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으로부터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된다.
피라네시는 미지의 공간을 배경으로 설정하며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긴장감을 제공한다. 광활하면서도 밀폐되어 있는 모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상상 속의 공간, 무한히 펼쳐지며 늘 새로운 경험을 제공함과 동시에 주인공을 옥죄고 있는 철저한 규칙성이 만들어 내는 폐쇄적이고 한정적이며 숨 막히는 공간. 작가가 ‘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그려내는 사건은 독자로 하여금 그 공간에 빠져들게 한다.
주인공은 ‘집’ 속에서 완전히 기억을 잃고 있다. 오랜 기억은 물론 최근의 기억까지 온전하지 못하다. 뒤섞인 기억 속에서 주인공은 ‘친구’에게 철저히 이용당한다. 그의 일지는 친구에 대한 찬양과 자신에 대한 자조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그러한 편향된 기록이 그의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고 있지만 그가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결정적 단서 또한 일지 속에 숨어져 있다. 그의 일지는 피라네시가 추리물 특유의 긴장감을 제공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일지 속 정보의 편향성을 마주하며 각 기록이 가지는 모순을 발견한다. 그는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수많은 기록 속에서 진실을 추리해 나간다.
이처럼 피라네시는 ‘공간’과 ‘일지’라는 두 가지의 주요한 소재를 통해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피라네시는 미지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판타지 소설이자, 일지 속 거짓들 사이에 파묻힌 하나의 진실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추리 소설이다. 그러나 그 진실이 곧 유일한 해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집’은 그를 속박하는 족쇄이자 아늑하고 안정감 있는 보금자리였다. 작가는 그 모순되고 양면적인 공간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2022년 11월 18일
© 이시후 (keepedia0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