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미국과 이란의 뿌리깊은 갈등…"왜 그들은 원수가 되었나"

이시후_ 2022. 12. 23. 09:53

 

▲고유가 봉착한 바이든, 그림의 떡이 된 이란산 석유
▲석유에서 시작된 악연…일명 아약스 작전
▲극적으로 체결된 ‘이란 핵 협정’…결국 극적으로 파기

 

지난 16일, 바이든 미 대통령은 중동 순방 일정 중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다. 연이은 고유가에 미국인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가운데, 바이든 대통령이 이번 방문에서 빈 살만 왕세자에게 증산 약속을 받아낼 수 있을지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이 당초 미국의 생각대로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한편, 유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러시아산 원유의 퇴출이 전부는 아니다. 사실 원유 시장에서 퇴출된 나라는 러시아 말고도 하나 더 있다. 바로 이란이다. 이란은 세계 원유 매장량 4위의 자원 부국으로 일일 원유 생산량이 3백만 배럴에 달한다. 그러나 이란에게 강력한 경제적 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왜 미국은 이란을 적대해야 했는가. 왜 미국은 이란과의 협력을 고려할 수 없는 것인가. 양국 간의 몇몇 사건들을 중심으로 역사적 흐름을 짚어보자. 

 

1950년대 초, 영국은 이란의 원유와 철도를 비롯한 수많은 이권 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다. 국가의 이권을 계속해서 외세에 빼앗기자 국민들의 반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마침 취임한 모사데크 총리가 석유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이란에 경제제재를 가했다. 이란을 향한 미국발 제재의 시작이었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은 일명 ‘아약스 작전’이라고 칭하는 비밀 작전으로 이란 군부의 쿠데타를 유도하여 정권을 뒤엎었다. 두 나라에 의해 왕조가 다시 들어섰고, 이란 왕조는 미국과 손을 잡고 개방적 정책을 펼쳤다. 바로 1961년 시작된 ‘백색혁명’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슬람 교리를 중시하는 민족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수차례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왕조는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다. 점차 시위는 거세지며 혁명의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결국 1979년 대규모의 이슬람 원리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이란의 팔레비 국왕은 해외로 도주했다.

 

미국이 팔레비 국왕의 입국을 허가하자, 분노한 이란 대학생들이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습격했다. 총 52명의 민간인을 인질로 삼고 444일이나 인질극을 벌였다. 미국 국민들에게 반이란 감정을 불어넣기에 충분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CNN은 이를 두고 “미국과 이란의 전쟁은 이 사건으로 시작돼 40년간 계속되고 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착수하자 양국 간의 관계는 더욱 차가워졌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2011년 미국은 강한 경제 제재로 이란의 경제를 압박했다. 경제 사정이 궁핍해지자 이란 내에서 타협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몇년 후 중도적 성향의 하산 로하니가 이란 대통령에 당선되자, 점차 따뜻한 화해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결국 2015년 7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극적인 합의가 체결됐다. 15년간 합의안을 잘 이행하면 이란은 합법적으로 핵 자원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란에 대한 제재도 즉시 해제됐다.

 

하지만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합의는 파기되었고, 각종 제재가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한시가 급한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이 역시 아쉬울 따름이다.

 

2022년 7월 17일

© 이시후 (keepedia06@gmail.com)